비욘드포스트

2024.10.03(목)
[신형범의 千글자]...가짜 노동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는 자기 책 《가짜 노동》에서 할 필요 없는 일, 하든 안 하든 상관없는 일, 별도로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일을 ‘가짜 노동’으로 정의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가치한 일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도 원하지 않는 회의, 뭔가 있어 보이는 긴 보고서, 과도한 의전 같은 것들이 여기 해당됩니다.

《가짜 노동》은 바쁜 척하는 헛짓거리, 무의미한 업무를 하는 데 시간을 보내느라 인간은 스스로를 일의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저자의 관찰에서 시작됐습니다. 예를 들어 일을 하는 데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일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일터에 실속 없는 장시간 노동이 만연해 있고 그만큼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현대의 노동문화, 특히 한국의 공기업과 많은 기업문화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2022년 기준 한국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1901시간입니다. 노동시간이 유난히 긴 중남미 국가들 – 콜롬비아 멕시코 코스타리카 칠레 – 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깁니다. 저자의 나라 덴마크는 1372시간으로 조사 국가 중 근로시간이 두 번째로 짧은데 한국은 이에 비하면 529시간을 더 일합니다.

한국에서 노동은 일종의 종교처럼 신성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느끼고 또 그런 시각으로 봅니다. 또 상대와 마찰을 피하기 위해 에두르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예의를 차리는 문화는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 없게 만들고 이런 게 가짜 노동으로 이어집니다. 조직에선 직설적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가짜 노동은 ‘신뢰 없음’에서 비롯됩니다. 불신이 가득한 직장에서 상사는 직원을 감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확인 절차와 서류작업을 요구합니다. ‘가짜 노동’입니다. 반면 직원들은 경영진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기 일을 싫어하게 됩니다.

결국 경영진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관리감독을 위한 절차를 없앨 때 모든 가짜 노동이 불필요했음을 알게 됩니다. 직원들도 자기 일이 가짜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임을 인정하고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더 써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계문화가 도입될 때마다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일합니다. 사람들은 계속 일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터놓고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AI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가짜 노동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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