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등 레거시 미디어를 탈피한 다양한 영상 플랫폼이 완전히 활성화되면서 센 장르 드라마들이 전성기를 맞았다. 학생들의 폭력과 마약까지 다루는 드라마들은 송출할 엄두도 못 내는 공중파 방송사 대신 OTT 플랫폼을 타고 활발하게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콘텐츠 다양성 측면에서 반길 만하다는 평가 한편에는 상대적으로 규제 사각지대인 OTT 플랫폼들이 자극만 추구하는 콘텐츠를 찍어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0대 주인공이 대마를?…상상 초월하는 요즘 드라마
25일 공개된 시즌(seezn)의 ‘소년비행’(제작 플레이리스트)은 부모에게 마약 운반 수단으로 이용 당하던 18세 소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쫓기듯 시골로 내려간 주인공이 현지 친구들과 대마밭을 발견하며 벌어지는 아찔한 에피소드를 그린 10대 느와르 드라마다.
‘소년비행’은 기성세대들 때문에 망해버린 젊은 인생을 절대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등장인물들의 의지로 가득하다. 이들이 벌이는 비행은 지금껏 시청자들이 공중파에서 접한 드라마들과 종류도, 전개도 전혀 다르다.
주인공이 키우던 텃밭이 사실은 대마밭이라는 설정부터가 파격적이다. 10대 주인공과 마약을 연관 지은 드라마는 그간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았다. 한국보다 콘텐츠 장르적 제약이 덜한 미국이나 일본조차 이런 소재는 다루기가 쉽지 않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10부작 드라마 ‘소년심판’도 10대가 등장하는 범죄 스릴러다. 소년범을 극히 혐오하는 판사가 우연히 지방법원 소년부에 부임하면서 겪는 소년범죄의 실상을 통해 적잖은 충격을 전한 화제작이다.
‘소년심판’은 김혜수와 이성민, 김무열, 이정은 등 관록의 연기파는 물론, 극중 소년범 백성우를 맡은 배우 이연의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시청자들은 그간 좀비와 폭력물 위주였던 넷플릭스의 한국산 콘텐츠에서 접하지 못한 소년범 이야기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특히 ‘소년심판’은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점이 주효하면서 외국서도 주목 받았다. 지난 16일 기준 넷플릭스 글로벌 탑10 TV(비영어) 부문에서 2주 연속 정상을 차지했고 지난 7~13일 2594만 시청 시간을 기록하며 한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총 4개국에서 탑10 1위에 올랐다. 일본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멕시코, 페루를 포함한 19개국에서 탑10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공개 3주째 탑10을 유지하는 등 글로벌 신드롬을 이어갔다.
BL(보이러브) 장르 역시 OTT 플랫폼을 타고 시청자와 만나는 중이다. 토종 OTT 왓챠의 오리지널 드라마 ‘시맨틱 에러’는 컴퓨터공학과 출신 아웃사이더가 완벽하게 짜놓은 일상에 안하무인 디자인과 인사이더가 에러처럼 등장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난해 BL드라마 ‘새빛남고 학생회’를 선보인 왓챠는 시청자 호평에 힘입어 올해 ‘시맨틱 에러’로 같은 장르 최강자 다지기에 나섰다. BL은 유교적 관념이 강한 우리나라 사회에서 아직 거부감이 적잖은 장르지만 꽃미남 배우가 이끌어가는 이야기 전개에 BL과 관련된 취향과 관련 없이 즐기는 시청자가 늘고 있다.
눈여겨볼 것은 BL이 이미 일본과 중국에서는 활성화된 인기 장르라는 사실이다.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남자들의 로맨스를 그린 일본의 ‘아재러브’(일본)나 중국 브로맨스 드라마 ‘진정령’ ‘산하령’을 미리 접하며 국내 콘텐츠에 목 말랐던 BL 마니아들은 한국 OTT에 등장한 같은 장르 드라마에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인기를 끈 원작 BL 소설이나 만화를 드라마화화는 경우가 많아 고정 독자를 확보하기 쉬운 점도 제작자 입장에선 장점이다.
■연기파·걸그룹 출신 가세…제작 여건 바뀐 센 드라마
지난달 공개 3일 만에 넷플릭스 비영어권 영화 탑10 5위에 오른 ‘모럴센스’는 남모를 독특한 성적 취향을 소재로 한 오피스 드라마다. 발음 상 제목에서부터 이상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모럴센스’는 소녀시대 멤버 서현과 배우 이준영의 파격 연기 변신에 시청자 시선이 집중됐다.
‘설마 우리 직장에도?’라는 묘한 자극을 주는 이 드라마는 요즘 OTT에서 날개를 단 세고 야릇한 드마라들의 제작 상황이 확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국민 걸그룹 소녀시대 출신으로 안정적인 연기력을 인정받은 서현이 이 정도 수위를 다룬 작품에 출연한 것은 이례적이다. 물론 공개 이후 예상만큼 수위가 높지 않다는 볼멘소리도 나왔지만 ‘독특한 성 취향’을 다룬 점에서 ‘모럴센스’는 OTT만이 가지는 이야기의 확장성을 살린 작품으로 평가됐다.
애플TV가 서비스할 ‘파친코’는 우리나라 배우 중 최초의 아카데미상 수상자 윤여정이 참여해 기대를 모은다. 연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배우의 등장만으로 극의 볼륨이 확 커지는 것이 OTT 콘텐츠의 특징이다. 지상파라면 엄두도 못 낼 내용은 물론 개런티 면에서도 여력이 있다 보니 좋은 배우, 믿고 볼 수 있는 연기파들, 아이돌 출신 인기 스타들이 속속 OTT 콘텐츠에 합류하고 있다.
■넷플릭스·디즈니·아마존에 토종까지…무한경쟁 벌어지는 OTT 시장
‘소년비행’을 서비스하는 시즌이나 왓챠 등 토종 OTT들은 넷플릭스나 아마존 등 시장을 선점한 강자들 틈에서 블루오션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결국 시청자를 모으는 것은 흥미로운 콘텐츠라는 점에서 그간 사람들이 공중파에서 접하지 못했던 것, OTT 선발주자들이 다루지 않은 소재에 집중한다.
콘텐츠 면에서 이제 식상하다는 평가를 받는 외국 OTT들은 잘된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 인기 콘텐츠의 영상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 피터 잭슨의 걸작 ‘반지의 제왕’ TV판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를 비롯해 최근 실사화된 연상호 감독의 피칠갑 드라마 ‘돼지의 왕’이 좋은 예다. 동명 게임을 실사화한 넷플릭스의 ‘위쳐’ 역시 인기에 힘입어 시즌3가 제작될 예정이다.
국내외 가릴 것 없이 OTT 업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콘텐츠 무한경쟁은 자칫 폭력과 선정성만 좇는 영상물 양산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영상 콘텐트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방송심의 규정이 기존 영상 플랫폼에 비해 느슨한 것이 사실이다 보니 이 점을 악용하는 제작자도 없잖다.
OTT 전용 콘텐츠 제작사 관계자는 “답답한 규제가 아닌 관련 법령 정비는 콘텐츠 내용 면에서 과열경쟁을 해소하는 장치이며, 이는 제작자들 입장에서도 반길 만하다”고 말했다. 이어 “OTT 영상들이 흥미만 추구하는 센 장르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는 시청자 감시도 필요하다”며 “사실상 국경을 넘어 다양한 OTT 플랫폼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좋은 콘텐츠가 나오기 위해서는 제작자와 소비자, 관련 기관의 상호 이해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