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2024.09.29(일)
[신형범의 千글자]...그 많던 그와 그녀들은 어디 갔을까?
30년도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직장생활 초기, 내가 근무하는 본사는 서울이지만 공장이 지방에 있던 탓에 출장이 잦았습니다. 일하는 건물 지하1층에 있던 여행사에서 출장 가는 기차표를 자주 구매하다 보니 여행사 직원과 친해졌습니다. 안부도 묻고 농담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기차표를 예매하러 여행사에 들렀는데 직원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무인판매기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그 때의 황당함이란. 이제 열차표를 끊으며 인사하고 농담할 상대가 없어진 것입니다(혹시라도 젊은 남자 사회초년생과 예쁜 여행사 직원의 로맨스를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고속도로를 오래 운전하고 나면 톨게이트에서 통행료를 받으며 인사하던 그녀들(?)도 사라졌습니다. 지하철 티켓을 사면서 유리창 너머로 환승역이나 길을 물어보던 그들(?)도 어느 순간 다 없어졌습니다. 식당에서 오늘 메뉴는 뭐가 좋다고 웃으며 추천해 주던 식당의 아줌마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제 일상 곳곳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주유소 주차장 마트 공항 학교 병원 은행에서 우리를 도와주던 그와 그녀들은 이제 없습니다. 가령, 창문을 내리고 신용카드만 내밀면 기름을 넣어주던 사람, 마트에서 장을 보고 바구니만 올려 놓으면 척척 계산해 주던 사람까지도. 그와 그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라는데 이 말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일자리가 사라져도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계가 그 일을 전부 대신해주지도 않습니다. 이 말은 그 일들이 없어진 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형태로 전가됐다는 뜻입니다.

자동차 주유구를 열고 기름을 넣고 다시 주유구를 닫고 계산하고 영수증을 챙기는 일은 내 몫이 됐습니다. 마트에서 산 물건들 바코드를 하나하나 찍고 계산하고 내 손으로 봉투에 담아 와야 합니다. 아무런 대가를 주지도 않는데 우리 몫이 돼버린 이런 노동을 경제학에선 ‘그림자 노동’이라고 합니다.

클릭 한번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요즘, 우리는 쇼핑을 하든 병원 예약을 하든, 하다못해 가전제품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해도 우리는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여 기계음이 시키는 대로 번호를 누르며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합니다. 카드회사에 전화해 궁금한 걸 물어보면 알아서 다 해결해 주던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직접 정보를 찾고 조사하고 비교하며 훨씬 더 오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기계가 일하는 시대라는데 사실은 고객이 일하는 시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지도 모릅니다. 그 많던 그와 그녀들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계에게 묻고 싶습니다. 기계가 인간을 능가한다는데 우리는 왜 더 많이 일하고 점점 더 시간에 쫓기며 사는 거냐고. 그러면 보나마나 기계는 ‘주민번호를 입력하고 안내를 따라 번호를 계속 누르라는 얘기를 끝없이 반복할 테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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