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2024.09.17(화)
[신형범의 千글자]... ‘역대급’이라는 말
딸아이는 지난 주말 한강공원에서 열린 공연 페스티벌을 이틀 내내 관람했습니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낮의 뙤약볕은 양산 없이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습니다. 언제부턴가 언론들은 매 여름마다 ‘역대급 더위’라고 호들갑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역대급’은 앞으로 매년 더 심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역대급’은 역사상 최고, 최대, 최악 등의 최상급이라는 말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표준말처럼 보이지만 정체불명의 단어이며 의미적으로도 부자연스럽습니다. 지금은 하도 많이 들으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10여 년 전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너무 불편했습니다.

이 말이 유행하게 된 데는 방송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내 생각에 이 말을 가장 많이 쓴 곳은 홈쇼핑 방송입니다. 상품을 어떻게 팔 것인가만 고민했지 제대로 된 우리말 교육은 받지 못한 쇼호스트들이 ‘역대급 가격’ ‘역대급 구성’ 운운하며 마구 남용하는 바람에 방송을 보고 듣는 사람들은 그게 맞는 말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역대’는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여러 대’ 또는 ‘그동안’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역대 최고의 미녀’ ‘역대 최고의 경기’ ‘역대 최악의 홍수’ ‘역대 전적’ ‘역대 대통령’ 등과 같이 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급’은 ‘국보급’ ‘전문가급’ ‘선수급’처럼 명사 뒤에 붙여서 ‘그에 준하는’의 뜻으로 쓰입니다. 혹은 ‘과장급’ ‘부장급’ ‘국장급’처럼 그 직급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 ‘역대’와 어법상으로 쓸데없는 ‘급’을 붙여 ‘역대급’이라는 괴상한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2010년부터 사람들의 입말에 너무 많이 오르내리다 보니 국립국어원도 정식 단어로 인정하진 않지만 ‘대대로 내려온 여러 대 가운데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는 등급’이라는 뜻풀이를 할 정도입니다.

조어법에도 문제가 있지만 의미상으로 부적절하고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 굳이 ‘급’을 붙이고 싶다면 최고급 자동차, 최고급 제품, 장관급 경호 등으로 명사 뒤에 붙여서 ‘그에 준하는’의 뜻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표준어를 쓰는 게 좋지만 언중(言衆)이 쓰는 입말이나 지역 방언, 신조어, 줄임말 등도 우리말을 풍성하게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쓰는 게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말의 격을 떨어뜨리거나 원칙과 질서를 파괴하는 말 대신 재기 넘치며 삶의 향기가 밴, 지혜와 풍자가 담긴 신조어라면 얼마든지 인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내가 인정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물론 아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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