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2024.10.10(목)
[신형범의 千글자]...내가 아시는 분
이거 아시죠? 일본어와 중국어는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모국어로 사용하는 자국민들은 어떨지 몰라도 외국인 입장에선 읽거나 해석할 때 불편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불과 1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한글도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 시도한 사람은 당시 조선인이 아니고 외국인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존 로스는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적용한 교재 《조선어 첫걸음》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 등이 한글 띄어쓰기를 확산시켰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어 말살정책을 이겨내고 지켜 온 우리말을 가능한 바르게 쓰려고 노력하지만 역부족임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한동안 사물 존대에 대한 오용을 언론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는데 상황이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어요” “세 개 합쳐서 5만8천 원이세요” 같은 말을 하도 많이 들으니까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이 쪽으로 누우실게요” “찾으시는 사이즈는 솔드아웃되고 지금 없으세요” “이 제품은 디자인이 아주 예쁘세요” 같은 괴상한 말들도 자꾸 듣다 보니 그게 맞는 표현으로 착각이 될 정도입니다. 모두 존칭보조어로 쓰이는 ‘시’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시’는 사람에게만 붙이는데 무생물인 사물에 붙이면 황당한 말이 됩니다. 그런데도 커피숍이나 백화점, 병원 같은 데서 자주, 아니 거의 매번 듣습니다. 전부터 지적이 계속 있었지만 고쳐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를 안 붙이면 불쾌해 하는 손님이 있다고 하니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종업원의 입장도 안쓰럽긴 합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또 부쩍 귀에 거슬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쪽 분야에 제가 잘 아시는 분이 계신데 한번 부탁드려 볼게요.”

“저도 아는 게 별로 없는데 저한테 계속 여쭤 보시더라구요.”

존칭보조어간 ‘시’를 엉뚱한 사람에게 붙이는 경우입니다. ‘제가 아시는 분’은 자기를 높이는 말입니다. ‘아시는 분’은 ‘나’가 아니라 ‘그분’을 주어로 할 때 ‘저를 아시는 분’이라는 형태로 쓸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라고 써야 합니다. ‘저한테 여쭤보시더라구요’도 자기 스스로를 존대하는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저한테 물어보시더라구요’ 라고 쓰는 게 맞습니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인간은 표현할 수 있는 어휘만큼 사고할 수 있습니다. 어휘가 부족하거나 잘못 쓰면 생각이 빈곤해집니다. 창의력은 없어지고 품격이 낮아집니다. 심하게 말하면 언어는 곧 인격입니다. 어떤 말을 쓰는지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올바른 말글살이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어제 한글날이어서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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