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2024.11.26(화)
[신형범의 千글자]...아들도 나쁘지 않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봐오던 꼬맹이가 자라서 결혼을 하더니 얼마 전에는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요즘은 결혼도 아이도 싫다는 젊은 친구들도 많은데 주변에 걱정 안 끼치고 반듯하게 성장해서 후세까지 생겼다니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축복했습니다.

요즘은 10주만 넘어가면 병원에서 성별을 알려준다며 아들이라는 소식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재미있습니다. 자기들은 딱히 딸을 원한 것도 아닌데 의사가 그러더랍니다. “요즘은 아들도 나쁘지 않아요, 괜찮아요.” ‘남아선호’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은 이 얘기에 모두 빵터졌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딸을 원하는 게 기본인 세상이 된 것입니다.

노벨상 수상 이후 인터넷으로 알려진 얘기인데 한강이 아이를 낳게 된 이유도 재밌습니다. 《문학동네》 2000년 여름호에 실린 자전적 소설 《침묵》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결혼 2년쯤 됐을 때 남편과 아이 낳는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답니다. 한강은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의 인생에 이르러 성취하겠다는 식의 소유욕에 염증을 느꼈고 다가오는 세상의 빛깔은 삭막해 보였으며 잔혹한 현실의 일들을 생각하면 고민 없이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무책임해 보인다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그래도 세상은 살아갈 만하잖아? 한번 살아보게 해도 죄짓는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러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여름엔 수박도 달고 봄에는 참외도 있고 목마를 땐 물도 단데, 그런 거 다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빗소리도 듣게 하고 눈 오는 것도 보게 해주고 싶지 않아?”

한강이 느닷없이 웃음이 터진 것은 그 때였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여름에 수박이 달다는 건 분명한 진실로 다가오더랍니다. 설탕처럼 부스러지는 수박을 베어 물 때 아무런 불순물 없이 그 순간을 맛봤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면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 여름에 수박을 베어 문 수박을 상상하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결정되기도 한다는 걸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아들은 이제 한강 문학의 일부가 됐습니다. 노벨상을 발표하는 날 차를 마시면서 수상의 기쁨을 나눈 것도 아들이고 한강의 마지막 작품 또한 아들 이야기입니다. 2019년 노르웨이 공공예술단체 ‘미래도서관’에 2114년에 출간될 미공개 소설 원고를 전달했는데 제목이 ‘사랑하는 아들에게(Dear son, my beloved)’입니다. 독립서점을 함께 운영하는 아들은 이제 한강의 문학적 영감인 동시에 예술적 동반자인 셈입니다.

자신을 닮은 녀석을 보고 싶어서든,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자를 닮은 녀석이든, 가문의 대를 잇든, 더운 여름날 시원한 수박을 맛보게 하고 싶어서든, 그게 딸이든 아들이든 아이를 낳는 이유는 거창할 수도 사소할 수도 있는 수천, 수백 가지이지만 다 괜찮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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