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2 13:20  |  피플

[훈샘의 국어 오디세이] 스토리텔링을 이해하는 힘

사진 = 훈샘국어학원장 강  훈
사진 = 훈샘국어학원장 강 훈
[글로벌대학 뉴스팀] 자미라 엘 우아실과 프리데만 카릭이 쓴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라는 책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인간은 이야기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 하는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목표, 그리고 결말로 이어지는 일관된 질서가 들어 있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는 저마다의 ‘서사’가 있다. 그러나 그 서사를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이 하는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머릿속에 먼저 떠올려야 할 두 가지 단어가 바로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이다. ‘내러티브’란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허구적이거나 실제적인 사건들의 연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이란 단순히 ‘이야기하기’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말이 아니라 글쓴이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혹은 화자와 청자가 이야기에 참여하는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야흐로 ‘수능국어 대란의 시대’가 도래했다. 전통 세대에 비해 30대 이하의 세대가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는 요즘, 대다수 청소년들에게 수능국어는 어렵고 두려운 과목이 되었다. 일선 현장에서 중고등부 국어를 강의하는 사람으로서 국어시험 점수가 낮은 학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님들의 고충 상담을 들어보면 대체로 ‘우리 아이는 책을 안 읽어서 국어를 못 한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단적으로 답변드리자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독서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글쓴이의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해력도 높을 가능성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수능국어에 출제되는 모든 지문은 단순히 독서량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늘날 10대 청소년들이 수능국어에 약한 이유는 어휘력이나 독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스토리텔링’ 자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많이 하는 학생이 수능국어도 잘 할 수 있다는 신화적이고 허구적인 믿음이 생겨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가 독서를 너무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독서는 그 자체로 즐거운 행위가 되어야 하고, 시간적 여유를 충분히 갖고 진행되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치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결과로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헤르만 헤세는 이미 100년 전에 “우리가 저세상에 갔을 때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독서의 양보다는 독서의 ‘질(質)’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어 미리 첨언해 두자면 독서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을 없애야 한다는 뜻이다.

수능국어는 전문적․사실적 정보의 집약체로서 그 안에는 방대하고 풍부한 지식과 정보들이 제시되어 있다. 실제로 4~5년 정도의 기간에 달하는 기출문제를 종합하면 고대 그리스로부터 20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계보를 그려볼 수 있을 정도이다. 경제학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수준높은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물리, 화학, 생명과학, 천체 물리학에 관한 지식도 충분하게 얻을 수 있다. 인문, 사회, 경제, 과학 등과 관련된 수많은 지식들이 두루 수록된 집합체이다. 사실 수능국어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들은 대부분 학계와 전문가들이 집필한 원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원전으로부터 추출하여 편집․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수능국어 지문은 원전의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 가운데에서 핵심 정보, 혹은 특정 정보를 중심으로 뼈대만 남겨놓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수험생이 이러한 지문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글쓴이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사실적 읽기’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뼈대만 남겨놓은 글’이라는 비유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능국어 지문은 사실상 ‘구조를 독해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수능국어는 우리에게 방대한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답이 제시되어 있는 지문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파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시험이다. 스토리 텔링을 수용하는 독자 혹은 청자는 우선 ‘화제’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가령 경제학과 사회학을 융합시켜 놓은 지문을 읽은 학생이 ‘이 지문은 세금 제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분석이다. ‘이 지문은 세금 제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법적․정책적 과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수능국어 비문학 지문을 독해하는 과정은 대체로 화제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용어․원리를 파악하는 작업에서 출발하여 구분․분류된 항목들과 개별 항목 안에 들어있는 속성을 이해하는 2단계를 거친 다음, 지문 안에 들어 있는 이슈, 즉 쟁점을 파악하여 대립항들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 모순, 대조점 등을 파악하는 과정으로 마무리된다. 모든 지문 안에 이와 같은 쟁점이 제시되어 있으며, 끝부분에서는 대체로 의의, 전망, 평가 등이 제시된다. 따라서 지문을 독해하는 학생은 사회경제 지문이나 과학기술 지문이 곧 경제학이나 생명과학, 물리학적 배경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답은 이미 지문 속에 들어있고, 배경지식 또한 지문 안에서 모두 마련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글을 써내려가는 글쓴이의 구성적 아이디어나 지문이 전개되어 나갈 과정을 예측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이해하는 힘’이야말로 수능시험에서 출제되는 길고 어려운 지문을 잘 이해하고 이후에 이어지는 추론과 비판, 종합, 재구성 등을 할 수 있는 바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실적 읽기 능력’이 잘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행 교육과정은 여전히 단편적 지식을 습득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수학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대신 문제풀이에 치중하고, 영어로 표현을 하며 영어로 된 고급 지식을 읽어내는 교육 대신 문법과 구문 분석에만 몰입하도록 요구하는 교실의 풍경은 2025년 현재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학교 수업에서도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고, 토론식 수업을 도입하고 있다고 항변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신시험에서는 이러한 토론과 스토리텔링이 모조리 제거된 채 단편적인 지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많이 풀이해야 좋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도록 출제되고 있다. 이런 내신경쟁 구조에서는 내용을 종합하고 재구성하여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없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필 평가라고 알려져 있는 학교 내신시험을 해결하는 데 천문학적인 사교육비가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도입부에 스토리텔링을 언급하면서 ‘인간이 하는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과 목표, 그리고 결말로 이어지는 일관된 질서가 들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관된 질서’를 읽어내는 힘이야말로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수능국어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앞으로 사회를 살아나가면서 풍부한 독서를 할 수 있는 힘, 스스로를 표현하고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힘 또한 스토리텔링에 들어있다. 우리가 가수나 배우 등 스토리텔링에 유능한 사람들에게 열광하고 그들에게 엄청난 부(富)를 안겨주는 이유도 인간이 이야기하는 존재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처럼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고, 스토리텔링을 이해하는 힘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겠다.

- 훈샘국어학원장 강 훈

글로벌대학 뉴스팀 news@beyondpos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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