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ad

logo

2025-03-18 19:27  |  피플

[훈샘의 국어 오디세이] 문학, 어떻게 읽어야 할까?

사진 = 훈샘국어학원장 강  훈
사진 = 훈샘국어학원장 강 훈
[글로벌대학 뉴스팀] 문학, 어떻게 읽어야 할까?

두 스님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스승이었고, 다른 한쪽은 젊은 제자였지요. 그들은 이윽고 강가에 이르렀고, 그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강물을 건너지 못한 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큰스님은 대뜸 “제가 건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여인을 품에 안고 강을 건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강을 건넌 후 여인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떠났습니다. 두 스님 역시 여인과 작별을 하고 계속해서 반나절을 걸어갔습니다. 절에 도착한 후 작은스님은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처럼 출가한 사람은 여색(女色)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아까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라고 다소 비난하는 마음을 담아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 큰스님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까 그 여자 말이냐? 나는 이미 마음 속에서 다 내려놓았는데, 너는 아직까지 그 여자를 마음에 안고 있느냐?”

짧은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이 작품 안에서 우리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풀어낼 모든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작품은 고전 수필의 하나인 ‘설(說)’ 문학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수필이라면 허구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보다는 조금 더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작품이 탄산 스님과 도반 스님이라고 하는 실존 인물들의 일화를 바탕으로 소설화시킨 작품이라면 일종의 ‘증언 문학’에 가까운 것이 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올린 소설가 한강의 작품 <소년이 온다>가 바로 그러한 증언 문학입니다. 수필이 교훈적 주제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증언 문학은 사실을 전달하는 효과가 좀더 풍부하고 생생하게 이루어진다는 데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광주 민주화운동을 역사책이나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결합에 의해 창작되는 산물(産物)로서 궁극적으로는 ‘감상’을 위한 대상이지만,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한 내용과 전달 효과를 높이기 위해 채택한 형식을 ‘분석’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문학은 감상과 분석의 협업 관계에 의해 보다 깊고 풍부한 감상과 수용이 가능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상과 분석의 협업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음악, 회화 등 여타 모든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요.

앞서 언급한 일화는 ‘무애행(無碍行)’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무애’, ‘수행(修行)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장애물(碍)이 없어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큰스님을 따라가던 젊은 승려는 불교의 교리에 집착하여 본질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해 스승은 오히려 어려움에 처한 여인을 도와준 행위였다고는 하나 다소 민망하다고 볼 수 있는 행위가 이루어진 다음에도 마음에 거칠 것이 없다는 점에서 불교의 본질에 도달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집착을 버린다’라는 본질적 행위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수행해 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우선 서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두 번째로 작은스님과 큰스님이 주고받는 대화가 ‘불교’라고 하는 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배경과 맥락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우리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여 음미하거나 성찰, 각성의 계기로 삼아볼 수 있겠습니다.

비문학은 일반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같은 형식에 담아 전달하는 반면, 문학은 같은 이야기를 다른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교과 과정으로 분류하다 보니 그 명칭이 ‘국어’가 되었지만 사실 국어는 ‘인문학’에 가까운 과목입니다. 인문학은 대체로 ‘문사철’, 즉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분야로서 그 본질은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와 철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기도 하지만 다소 학문적인 영역이라고 볼 수 있어 ‘탐구’라는 말에 좀더 그럴듯하게 어울려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인문학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행위가 주를 이루는 ‘문학’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청중을 설득하는 3대 요소로서 에토스(인격․윤리), 파토스(감성), 로고스(이성)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파토스는 지속적인 열정이나 정념, 혹은 고통이나 질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문학에도 이러한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가 들어있지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문학은 ‘에토스’를 전달하는 매체이기도 합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정답해설지’와 비슷한 것이지요.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올바른 가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진리란 무엇인가… 문학이 인간에게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인간을 탐구하는’ 본질적 사고가 이야기를 이해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것입니다. 문학을 단순히 감상 행위로만 수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로고스에만 치중하면 지루해집니다. 반면 파토스에만 집중하면 거짓과 과장이 가미될 가능성이 높아지죠. 에토스에만 치중하면 설교처럼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문학은 이 세 가지 영역이 골고루 잘 버무려진 맛있는 음식과도 같습니다. 설교와 논리가 감성의 영역과 잘 어우러져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용과 형식에 대한 분석이 수반될 때 보다 풍부한 감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입시 문학은 이와 같은 분석과 감상의 창(窓)을 열어주는 길잡이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간에 입시 문학은 수능시험의 성격상 답이 정해져 있어서 오히려 문학 감상을 방해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이 역시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비판인 셈입니다. ‘진달래꽃’을 한아름 따다가 나를 떠나가는 임에게 뿌려주는 행위가 무엇인지 분석해 보는 작업이 선행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가치가 세상에는 있을 수 있고, 이별의 과정 속에서도 대상을 위해 축복을 빌어줄 수 있는 좀더 숭고한 사랑도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입시 문학 교육’은 이론적인 틀이나 생각의 창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김소월 시인은 <진달래꽃>이라는 시를 쓰면서 분명히 그처럼 ‘숭고한 사랑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창작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인생은 예술을 모방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장이야말로 문학이란 무엇인지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이정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문학은 ‘에토스’에 관한 이해, 즉 바람직한 삶의 모습과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이 우리의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문학을 모방하면서 살아가도록 창조되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당대의 ‘모던 보이’들은 저마다 깊은 좌절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 이상, 백석 같은 시인들의 작품은 저마다 이와 같은 좌절과 갈등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윤동주 시인의 <병원>에서는 ‘나도 모를 아픔을 참다가 병원에 와서 살구나무 아래 병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여인 하나를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진찰실에 가서 의사와 상담을 나누는데, 눈앞에 있는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르며, ‘당신에게는 병이 없다’라고 진단합니다. 뚜렷한 병명이 나올 리가 없지요. 식민지 시대를 아파하는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지나친’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운율도 형성되고 상황의 엄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기에 ‘지나친’ 이 시대가 젊은이를 짓누르고 있음에도 성낼 수조차 없는 것이지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절망과 좌절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엿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가 병원에 들어설 때 보았던 살구나무 아래의 여인이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로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게 됩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 자리에 누워본다.’

이역에서 봄을 맞으나 봄인 줄 모르다가

아침결에 눈송이 새로 날리는 것 보고 놀라네

바깥 풍경의 변화에

즐거워하거나 슬퍼하지 말지니

봄날의 기운은 분명 이 몸에 있기에…

병자호란이라는 격랑을 앞에 두고 약소국의 불행한 운명과 부정적 시대 현실을 슬퍼했던 최명길이 쓴 시로 마무리합니다. 혼군과 암군의 시대, 혹은 그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는 군주의 무능은 결국 한 시대 전체의 고통을 불러오게 되지요. 청나라에게 무참히 짓밟혔지만 속국이 되는 것만은 막았던 최명길은 북쪽 만주에 억류된 채로 화친의 후속 처리를 감당하고 있었지요. 중국 내륙 북쪽에 위치한 심양은 몹시 추운 지역입니다. 봄이 왔어도 춘설(春雪)이 내리는 풍경 앞에서 도저히 봄은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고매한 선비는 다시 마음의 평정을 되찾습니다. ‘외물(外物)의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춘설이 내리고 날이 추워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스스로의 내면 안에서 ‘봄날의 기운’을 길어올리고자 합니다. 어수선한 정국을 거치고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 시민들이 되새겨볼 만한 시입니다. 오늘처럼 춘설이 날리는 추운 봄날 아침, 여전히 겨울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여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도 결국 우리 안에 길어올릴 ‘봄날의 기운’이 들어있음을 일깨워주고 절망을 이길 수 있는 자세를 가르쳐 주는 것, ‘문학의 본령(本領)’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우리가 그것을 본받으며 인생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요.

- 훈샘국어학원장 강 훈

글로벌대학 뉴스팀 news@beyondpost.co.kr

<저작권자 © 비욘드포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