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기고] 토요일마다 전해진 1000통의 인문학 편지](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2514452106304a310e7658412113115985.jpg&nmt=30)
성장인문학 CEO이자 동국대학교 교수인 박영희 교수(아호 둔재, 鈍齋)가 지난 20년간 한 주도 빠짐없이 써온 '토요 편지'의 1000호 발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 것이다.
둔재(鈍齋), 느림과 꾸준함의 철학
박 교수는 스스로를 '둔한 사람', 즉 '둔재(鈍齋)'라 칭한다. 날카롭고 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이기보다는, 느리게 사유하고 천천히 나아가는 삶을 지향해온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아호다. 이 아호처럼 그의 편지는 늘 빠름의 시대를 거스르는 느림의 언어로, 그러나 그 누구보다 꾸준하고 깊게 독자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왔다.
한 편지의 시작, 고려의 눈 속 시 한 수에서
박 교수는 '토요 편지'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한 편의 시를 꺼낸다.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1168-1241)의 시, 「설중방우인불우(雪中訪友人不遇)」다.
雪色白於紙 (설색백어지) 눈 색이 종이보다 더욱 희어서
擧鞭書姓字 (거편서성자) 채찍 들어 이름자 휘갈겼네
莫敎風掃地 (막교풍소지) 바람아 불어서 땅 쓸지 마라
好待主人至 (호대주인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렴
이 시는 친구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한 시인의 아쉬움과 기다림, 그리고 그리움의 정성스러운 흔적을 눈 위에 남기는 장면을 담고 있다. 박 교수는 이 시를 접하고 큰 감동을 받았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그 흔적을 진심으로 남기고 싶다는 다짐에서 2004년 4월 24일, '토요 편지'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 시처럼, 편지는 존재하지 않는 순간에도 상대를 배려하고 기다리는 마음의 형식이며, 박 교수는 그것을 글로 구현해낸 셈이다.
1000회의 시작은 매주 "부족했다"는 고백에서
박 교수의 '토요 편지'가 1000회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매주 "이번 글은 부족했다"는 겸손한 마음이었다.
그는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편지를 보낸 날부터 지금까지, 저는 매주 이렇게 다짐해 왔습니다. '이번 주 글은 부족했어. 다음 주에는 더 잘 써야지.' 그 생각이 쌓이고 쌓여 오늘 1000회까지 왔습니다."
이 겸손한 자책과 다짐은, 독자들에게는 위로의 글이 되었고, 박 교수에게는 성장과 지속의 힘이 되었다. 그 작은 마음 하나가 수천 독자의 심장을 울리고, 이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편지 문화로 확장된 것이다.
기록은 사랑이다 — 감동으로 채워진 행사 현장
'천 번의 들숨과 날숨'이라는 상징적인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제자, 동문, 가족, 그리고 문인들과 방송인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소설가 김홍신, 방송인 김병조, 이황우 동국대 명예교수 등 각계 인사들이 박 교수의 20년 여정에 깊은 존경을 표하며 영상과 축사로 감사를 전했다.
박종명 시인이 헌정한 시 「달빛어부」의 낭송, 추억의 곡 '편지'의 합창, 그리고 제자들이 박 교수에게 띄운 손편지 영상이 이어지며, 행사장은 눈물과 웃음, 고요한 감동으로 물들었다.
편지로 쌓은 인문학의 성채
그가 편지를 쓰기 위해 읽어낸 책만 1500권 이상, 신문 칼럼 스크랩은 10박스를 넘었다. 1년 반의 안식년을 제외하면 거의 쉼 없이 이어져온 이 기록은 단순한 습관이 아닌, 사람을 향한 오랜 헌신이었다.
![[하루 기고] 토요일마다 전해진 1000통의 인문학 편지](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5032514454904282a310e7658412113115985.jpg&nmt=30)
디지털 시대, '느림'이 가진 외교적 가치
외교는 타인과의 신중한 대화이며, 진심을 담아 관계를 지속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박 교수의 편지는 인문학과 외교가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그의 글은 언제나 상대를 배려하는 언어로 쓰였고, 단어 하나하나에는 예의와 사유, 그리고 감정의 결이 담겨 있다. 이번 행사를 보며 느낀 것은, 이 1000통의 편지가 결국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진정성 있는 외교문서였다는 점이다.
그는 최신 인공지능 도구들도 사용해보았지만, 끝내 "사람이 사람에게 보내는 문장만이 가진 체온과 결은 결코 대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1000호가 발송된 다음 주 토요일 아침인 오늘, 박 교수는 어김없이 1001번째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은 행복한 토요일입니다. 흔히 토요일을 Weekend 라 하여 한 주의 끝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토요일은 지난 한 주를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제공합니다. 새로운 한 주, 멋지게 구상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내용은 그의 토요편지 제 1호의 마지막 문장이며 답례사이기도 하다.
그가 걸어온 길, 그리고 걷고 있는 길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조용한 문장들의 행렬이다. 다음 세대가 다시 눈 속에서 친구를 찾아 휘갈긴 글자를 따라, 기다림과 존중, 겸손과 사랑의 길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하루(HARU).
황상욱 기자 eyes@beyond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