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박찬욱은 런던에서 오랫동안 일할 때 잠을 못 잘 정도로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위로가 됐던 노래가 정훈희의 《안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안개》라는 노래를 사용할 수 있는 영화를 떠올렸고 그게 바로 2022년 개봉한 《헤어질 결심》의 출발점이 됐다고 후일 밝혔습니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노래 《안개》는 OST로 쓰였고 박찬욱 감독은 주제가를 위해 원곡 가수인 정훈희에게 녹음을 부탁했습니다. 50년도 더 지난 데뷔곡을 다시 불러달라는 부탁을 받은 정훈희는 거절했습니다. 노래를 불렀던 17살 때처럼 청아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감독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현재 목소리가 너무 좋고 정훈희가 아니면 영화도 없다며 송창식과 같이 부르면 분위기가 더 살 것이라며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2년 동안이나. 결국 두 노장 가수는 정훈희의 데뷔곡 《안개》를 55년 만에 다시 부르게 됐다는 뒷얘기가 전해집니다.
영화는 한 남자의 사망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해준(박해일)이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만나면서 시작합니다. 해준은 좀처럼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유족 서래를 의심하면서도 관심이 점점 깊어집니다. ‘서래와 해준의 끝내 이루지 못한, 지고지순한 멜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륜도 아닌 사랑’이라고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복잡미묘하게 얽힌 실타래 같은 영화는 두 거장 가수의 노래가 흐르며 끝이 납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안개》의 첫 소절이 흐르자마자 스토리의 애매함이 갑자기 선명해집니다. 정훈희의 첫 소절에 울컥하는 순간 송창식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소름이 돋습니다. 연륜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표현하지 못하는 다른 힘이 느껴집니다. 세월의 힘을 이기고 내뱉는 숨결과 인생을 충분히 경험한 노장의 노랫말은 별 기교를 부리지 않는데도 탄식을 자아냅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또 들으면서 《안개》가 《헤어질 결심》이며 《헤어질 결심》이 곧 《안개》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습니다. 참, 사진은 청라호수공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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