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포스트

2025.02.22(토)
[신형범의 千글자]...넌 이름이 뭐니?
헬스클럽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보니까 가끔 만나는 친척이나 웬만한 친구보다 훨씬 친숙합니다. 그 사람이 운동하는 패턴이나 순서도 잘 압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도 통성명을 한 적 없으니 이름은 모릅니다.

사물도 그런 게 있습니다. 주변에 널려 있고 심지어 자주 사용해서 익숙한데 이름은 모르는. 이름을 몰라도 생활하거나 사용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필요할 땐 쓸모를 설명하면서 ‘그거’라고 하면 다른 사람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거’는 몰라도 상관없고 알아도 딱히 내세울 곳도, 잘난 척할 수도 없는 그런 사물들입니다. 그런 ‘그거’들만 추려서 소개한 책이 《그거 사전》입니다. 사람의 이름을 알고 나면 관계가 새로 시작되고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이름을 알고 나면 사물이 달리 보일 때가 있습니다. 무명의 ‘그거’들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책에 실린 ‘그거’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피자를 배달시켜 본 사람은 다 압니다. 피자 중앙에 꽂혀 있는 플라스틱 삼발이. 이게 없으면 피자의 열기와 습기 때문에 포장 상자가 주저앉아 피자 위에 들러붙게 됩니다. 피자상자를 여는 순간 쓸모를 다하고 버려지는 ‘그거’의 이름은 피자세이버(Pizza saver)입니다.

② 귤 알맹이에 붙은 하얀 실 같은 ‘그거’의 이름은 귤락입니다. 대부분 떼어내고 먹는데 비타민C와 식이섬유가 많아 콜레스테롤 농도를 낮춰준다고 합니다. 고혈압, 당뇨환자나 혈관이 약한 고령자는 떼지 말고 알맹이와 함께 먹는 게 좋다고 합니다.

③ 고급 중식당에 가면 원형 테이블 중앙에 돌림판이 있습니다. 테이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요리는 회전판을 돌려 가져오면 됩니다. 중국말로는 짠쭈어좐판이라고 하는 ‘그거’의 이름은 뜻밖에 레이지 수잔(Lazy Susan)입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④ 배달음식을 주문하면 포장지를 뜯는 일회용 칼이 들어 있습니다. 톱니 모양의 날과 손잡이가 일체형으로 된 조그마한 플라스틱 ‘그거’의 이름은 랩칼이라고 합니다.

⑤ 와인 좋아하는 사람은 다 아는데 와인병 바닥은 움푹 패여 있습니다. 침전물이 잘 떠오르지 않게 하고 병의 표면적을 넓혀 내부 압력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보조개처럼 오목하게 들어간 ‘그거’의 이름은 펀트(Punt)입니다. 처음 알았습니다.

⑥ 테이크아웃 커피 잔에도 ‘그거’들이 많습니다. 뜨거운 컵을 쥐기 편하게 감싼 원통형 종이를 컵 슬리브(Cup sleeve)라고 하고 빨대인지 스틱인지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빨간색 얇은 막대는 십스틱(Sip stick)이라고 합니다. 또 열지 않고 마실 수 있는 테이크아웃 컵뚜껑 ‘그거’의 이름은 커피리드(Coffee lid)입니다.

⑦ 세상 쓸모 없는 물건 중 하나가 양말 한 짝, 즉 반켤레입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양말의 앞코 부분을 짚어 한 데 묶어주는 조그만 얇은 금속의 이름은 양말코핀입니다. 제조, 유통하는 사람은 요긴한데 소비자 입장에선 두 번 쓸 일 없는 천덕꾸러기입니다.

⑧ 아파트 현관문 밖을 내다보는 구멍 ‘그거’의 이름은 외시경입니다. 미국말로는 도어스코프(Door scope)라고 하고 문이 저절로 닫히지 않게 바닥에 걸쇠 같이 거는 ‘그거’는 도어스토퍼(Door stopper)입니다.

⑨ 두루마리 화장지를 다 쓰고 남는 종이 심 ‘그거’의 정식이름은 지관(紙貫)이고 마트 계산대에서 앞 사람 물건과 구분해주는 막대기 ‘그거’는 체크아웃 디바이더(Checkout divider)입니다.

⑩ 새로 개업한 식당이나 가게 또는 주유소 같은 데서 춤추는 풍선 ‘그거’ 보셨죠? 그 녀석의 이름은 스카이댄서(Sky dancer)라고 한답니다.

이제부턴 ‘그거’ 말고 이름을 불러 줘야겠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한 김춘수 아저씨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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